즐거운
문화 읽기
치열한 콘서트 티켓팅, 경연 프로그램 문자 투표, 무한 노래 스트리밍, 화려한 생일 카페, 꾸준한 조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돌 팬덤의 전유물이었던 일들이 시니어에게로 빠르게, 그리고 한층 널리 옮겨붙고 있다. 경제력과 시간을 두루 갖춘 시니어 팬덤이 빚어낸 흥미로운 풍경이다.
시니어 팬덤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활동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과도한 몰입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말리던 부모에서 열광적인 팬덤으로
임영웅, 송가인 등 최정상 트로트 가수의 컴백 소식이 들려오면,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는 긴장감과 허탈함이 감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하는 자신의 아이돌이 주요 차트 상위권을 차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서 오는 긴장감이자, 최선을 다해 덕질해도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불거지는 허탈함이다. 시니어 팬덤의 힘과 입지는 이토록 대단하다. 좋아하는 가수 따라다니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던 부모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친애하는 트로트 가수를 열광적으로 따라다닌다. 팬 카페 등에 올라오는 스케줄을 따라 전국을 누비며 기꺼이 팬덤 단체 티를 입고, 응원봉과 머플러를 힘차게 머리 위로 올리고, 정해진 응원 구호를 일사불란하게 소화한다. 가수의 순위권 도약을 위한 문자 투표와 ‘숨스밍(숨 쉬듯 노래 스트리밍)’은 기본, 죽부터 자동차까지 그를 홍보 모델로 쓴 제품도 가리지 않고 구매한다. 이런 행보를 어른들의 일탈 정도로 여겼던 세상은 어느새 이들을 ‘시니어 팬덤’이라 부르며 극진하게 대우하고 있다. 이들이 가진 시간적·경제적 탄환이 엄청난 화력을 뿜어내며 대중문화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덕’ 직후부터 급성장한 시니어 팬덤
직장 생활, 집안일, 육아 등이 뒤섞인 빡빡한 현실 아래 잠들어 있던 시니어 팬덤의 분출 욕구는 2019년과 2020년에 연이어 방영된 <내일은 미스트롯>과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즌1을 통해 그야말로 대폭발했다. 열심히 일하고 아이를 키우며 통장을 불리고 자녀를 독립시켰지만, 나만의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시니어에게 여유는 공허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앞에 혜성처럼 등장한 트로트 신성들은 별것 없는 일상에 신선하고도 특별한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자녀에게 문자 투표하는 법을 배우며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에게 ‘입덕’한 시니어들은 여느 팬덤처럼
하나둘 모여 단합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그 규모와 성장세는 단시간에 아이돌 팬덤을 가뿐하게 추월했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을 뿐, 이들은 탄탄한 경제력과 시간적 여유를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작년 12월 발표한 「콘텐츠 산업 트렌드 2028」 연구에서 ‘콘텐츠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니어 팬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콘텐츠가 앞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며 이들에게 ‘골드 실버(Gold Silver)’라는 별칭을 붙였다. 시니어 팬덤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연구 결과다.
‘○○앓이’에 녹아 있는 긍정적 효과
<내일은 미스터트롯>과 함께 시작된 임영웅 신드롬과 시니어 팬덤을 분석한 책 《영웅앓이》를 쓴 심리학자 김은주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시니어 팬덤은 사회적 통념에 맞춰 사느라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욕구를 스타를 통해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시니어들은
팬덤과 함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을 통해 강한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끼는데, 이는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 3단계(애정과 소속)와 4단계(존중)에 해당한다”라고 전했다. 또한 이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면 5단계(자아실현)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게 김은주 박사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시니어 팬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마냥 주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긍정적 효과가 만만치 않다. 가수를 향한 덕질은 이들에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 인생의 새로운 의미, 색다른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인기 트로트 가수의 콘서트가 열리는 각 지방은 오랜만에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으며, 덕질을 둘러싼 경제적 파급 효과도 크다. 이렇듯 시니어 팬덤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활동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과도한 몰입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